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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공부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1부

by 청춘차렷 2017.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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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7. <<인간 불평등 기원론>> 

 

1. 서론

 

현재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축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 경제를 이끌어 가는 자본주의와 공적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민주주의는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중요한 운영 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시점을 30년 전으로만 당겨 봐도 이야기는 달라 지게 됩니다. 냉전시대, 세계는 전례 없이 반으로 나뉘어 싸웠고 그 중심에는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가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멸망과 함께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해치는 이론이었으며, 자본주의와 대척하는 반대의 이론이었을까요? 실제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노동시간의 단축, 노동환경의 개선, 최저임금의 시행 등 여러 가지 쟁점 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했다는 현재에도 자본주의 안에 숨 쉬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르크스주의는 역설적으로, 불평등이 당연시 여겨지는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더욱 공고히 유지시켜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논의의 핵심은 ‘불평등’입니다. 그것이 생산수단의 독점으로 인한 결과의 불평등이든 권력에 의한 폭력이든 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사회복지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미지의 체제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이 바로 ‘사회복지’였습니다. 평등을 지향하지만 불평등을 유지시켜주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모순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이 바로 이 불평등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혁명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듯,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질병 자체를 연구하듯 복지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불평등을 공부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집필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은 총 3가지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루소는 논문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인간사이의 불평등이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논문 1부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과 2부 불평등이 생겨나게 된 시점을 ‘추론’하며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2. 본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확인한 불평등의 시작은 ‘관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야기하는 불평등이라는 것 자체가 생산수단의 불평등, 즉 경제적의미의 불평등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에 ‘소유’의 개념이 발생한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번 글에서는 소유에 앞서 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루소가 논문을 작성하던 시기는 ‘계몽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중세암흑기의 유럽이 철학과 학문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미신과 무지에서 깨어나 인간행동의 발전이라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이 시대의 주류였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기대와 달리 당시 시대는 인간발전을 이루기는커녕 의미 없는 철학과 궤변이 난무하였고 불평등과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즐비했습니다. 루소는 <<학예론>>(1750)을 발표하며 이러한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고, 당대의 계몽주의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를 더욱 심화시켜 작성한 작품이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필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내용 전반에 걸쳐 ‘이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론에 앞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계몽주의사상가들과 루소의 대립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차이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두 사상 모두 자연법에 따라 자연인에게 부과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에 대해 역설하였고, 전제군주제의 폐해에 대해 비판하며 프랑스혁명을 이끄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다만 불평등과 악이 만연해있는 사회가 형성되기까지의 책임을 시민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봤는지 소유에서 비롯된 조직과 권력 그 자체에 있다고 봤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1부 : 자연인에 대한 추론

 

그는 떡갈나무 아래에서 배불리 먹고 시냇물을 찾아 목을 축이며, 자기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준 바로 그 나무 발치에서 잠자리를 발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었다.(pg51)

…즉 자연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들을 더욱 강건하게 만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시켜버리는 것이다.(pg52)

그들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못한다. 그들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행복은 음식과 이성과 휴식 뿐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불행은 고통과 굶주림뿐이다.pg63)

그들의 마음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의 자질구레한 필수품은 손이 쉽게 닿는 곳에 있으며, 그들은 더 높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지식에서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선견지명도 호기심도 지닐 수 없다 … 그들의 마음은 오직 눈앞의 자기 생존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하여 곧 닥쳐올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pg63)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pg56)

 

루소가 추론을 통해 그려낸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자연인이란 오랜 진보와 사회화로 인해 발생한 모든 인위적인 능력을 제거한 상태의 인간입니다. 계몽주의에서 말하는 문명인으로 가는 조건인 ‘이성’이 결여된 상태입니다. 계몽주의자들에 따르면 이성이 결여된 미개인의 세계는 암흑기여야 하는데, 루소는 이 자연인의 모습이야 말로 불평등에서 자유로운 행복한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루소는 이성 이전에 인간에게 존재하는 2가지 본능적인 특성을 근거로 이성이 결여된 미개인들의 사회를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 특성은 자기 보존의 욕구, 두 번째 특성은 연민입니다.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pg79)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함이 분명하다. 남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도와주러 나서게 되는 것은 바로 연민 때문이다. 연민은 자연 상태에서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하며…(pg83)

인간은 동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pg80)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정념과 대단히 유효한 자제력을 지니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자연인)은…, 타인을 해치고 싶은 마음보다는 타인에게서 입을지 모르는 피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위험한 분쟁에 휩싸일 우려가 없었다.(pg84)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pg89)

 

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루소는 자연인을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정념과 대단히 유효한 자제력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연민의 감정은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넘어 ‘저기 피 흘리며 아파하는 다른 인간이 나였다면?’ 이라는 가정을 함으로써 나와 다른 사람을 일체화하는 과정을 거치면 연민이 극대화되는데, 이성을 발달시킨 철학자들은 자연에 반하는 이치를 따져 연민을 외면하기 때문에 무질서가 생겨나 제도와 법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루소의 자연인은 본능적 욕구를 넘어서는 욕망을 가지지 못했기에 행복했습니다. 생존을 넘어서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본능적인 특질로 인해 타인을 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생존을 넘어서는 관심에는 사랑 역시 포함되는데, 본능적인 성적 욕구를 넘어서는 사랑도 사회적으로 습득한 개념이기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자연 속에서 개인으로서 생존하는 자연인이 바로 루소가 주장하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2부 : 2017.09.14.(목)에 이어서

 

3. 결론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과 교육수준의 향상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루소와 계몽주의자들이 타도하고자 했던 전제군주제는 무너졌고 시민들의 의식 또한 높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약 260년 전 집필된 고전은 현대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루소는 사회의 불평등을 개인의 무지와 부족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사유의 개념이 생겨남과 동시에 발생한 가족, 사회, 국가의 형성에서 불평등을 찾고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화함으로써 본래 공유재산이던 자연이 개인에게 소유되고, 자연적불평등이 정치적·도덕적불평등으로 전환되며 국가와 법에 의해 정당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재산권과 개인능력에 따른 차별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지 모른다 라는 의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공부해 볼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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