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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공부

엘리자베스구빈법 이후의 영국 사회복지역사(2)

by 청춘차렷 2017.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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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어대훈의 Human 사회복지학개론을 참고하였습니다.]

 

ㅁ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 : COS)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산업화·도시화로 많은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습니다. 자연히 도시빈민들이 늘어났고 이를 해결하고자 1800년대 초부터 많은 수의 민간 자선단체가 조직되어 구빈활동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민간단체 각각의 자선활동으로는 도시빈민들의 가난과 어려움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민간 자선사업기관들의 활동이 비계획적이고 무차별적이며, 비조직적이고 비전문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었습니다.(ex. 같은 대상자에 여러 기관에서의 중복 수혜 등) 이에 따라 보다 효율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문적인 자선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연합체를 결성할 필요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칼 드 슈바이니츠의 ‘영국의 사회복지발달사’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트 랜드 지역의 대다수 성직자들은 이제 구빈 담당공무원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엄청난 돈이 모금되어 이 성직자들에 의해 가난한 사람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또는 지역방문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분되고 있다. 하지만 지역방문자들의 9/100은 여성들인데 이 여성들 대다수는 모금된 돈의 합리적인 배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스트 앤드 지역에는 100여 개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기관들이 동일한 대상자들을 향해 구제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서로 간의 조화나 협력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른 기관이 어떤 활동을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도 없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구걸과 관련된 기만행위가 극에 달하고 있으며 거지도 많이 늘어나 결과적으로 수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한 구걸문화가 판을 치제 되었다.(존 리처드 그린 신부가 1867년 12월 「토요평론」에 기고한 ‘런던 이스트 앤드 지역의 구걸문화’에 관한 글에서)

 

교회와 박애적인 조직들의 무질서한 구호를 개선하고 민간 사회복지기관들의 활동을 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1869년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자선조직협회가 설립되었으며, 이때 이 협회의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은 로크경이었습니다.

 

자선조직협회의 조직 목적은 중복구호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자선활동을 조정하고, 환경조사와 적절한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러 자선단체로부터 중복구제를 받으려는 직업적인 사기행위를 방지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한 방법으로 클라이언트를 자선단체에 등록시켰고 또한 각 기관 사이의 조정 협력을 위한 연락기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사회복지 정보교환과 같은 지역사회조직사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환경조사 및 적절한 원조제공을 통해 빈민들이 자력으로 빈곤을 탈피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는데, 이와 같이 탈빈곤 동기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된 사회중산층의 우애방문과 감화활동은 개별사회사업과 자원봉사활동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자선조직협회의 특이했던 점은 앞서 진행했던 방문사업을 통해 빈민들을 조사하여, ‘구제 받을 가치가 있는 빈민’을 선별하여 / 일할 능력이 있는 빈민이나 알코올중독자, 창녀 등에게는 도움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도덕적 의무를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자선조직협회의 슬로건은 “빈민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자”였습니다. 자선조직협회는 개인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당시 빈민 문제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사회경제적인, 구조적문제에 기인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자선조직협회의 이데올로기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자유방임적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본정신은 개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수혜자의 도덕심과 가치관을 고양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당시 자유방임주의 이론이 다윈의 적자생존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정부 활동을 위축시키고 개인간 경쟁을 통한 생존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때문에 사실 자선조직협회의 활동은 상류나 중류계층으로부터 하류계층으로의 재분배 기능을 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도 하였고 부자와 빈민 간의 불평등을 기정사실화했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ㅁ 인보관운동(Settlement House Movement) = 복지관

인보관 운동의 핵심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선조직협회가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사회적인 측면을 무시한 반면, 인보관운동은 빈곤의 원인을 사회경제적인 구조적 문제로 봤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문제가 있는 지역사회로 들어가 빈민과 함께 거주하며 그들의 교화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인보관운동의 3R : Residence(거주) Research(연구) Reform(개혁)

 

인보관운동은 실업자의 증가와 인구의 도시집중화에 따라 슬럼지역이 생기는 등 사회가 새로운 도시문제로 시달리게 되자 이러한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갖고 있는 지역사회로 들어가 빈민과 함께 거주하면서 주변 환경의 개선과 빈민의 도덕적 교화에 힘써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인보관운동을 주도한 운동가들은 빈곤의 원인을 무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직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무지나 게으름과 같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화의 착취 결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빈곤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위에 언급했듯 인보관운동은 바네트 목사의 주도하에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인보관운동에 앞장서다 폐렴으로 요절한 아놀트 토인비를 기념한 토인비관이 최초의 인보관이었는데 이곳이 인보관운동의 핵심지였습니다. 박애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지도층들이 빈민지구로 이주하여 자선활동을 하였으며, 산업화로 인해 생성된 빈부 간의 거리를 연결하고, 상호 간의 불신을 해소하며, 한 계층이 다른 계층을 무시하는 것을 줄이고, 자선을 행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인보관사업의 기본적인 목적은 빈민들과 교육받은 계층 간의 상호교류를 증진시키고, 이러한 공동활동과 연구를 통해 서로 문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지식인들이 주축이었던 영국의 인보관운동은 박애보다는 상대적으로 법규를 더 중요시 여겨 1900년대 초반의 사회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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